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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드서핑 인생이야기

풍우희 2011.09.08 11:05 조회 수 : 700



한가위’ 추석날 “윈드서핑 인생(人生)” 이야기


한가위 “추석절” 이다.
고향에 모처럼 온 가족들이 함께 모여 오순도순 “가족들 이야기”를 하지만
윈드서핑을 타는 윈드서퍼들은 이 하이시즌 추석절에 올해도 애틋한 “윈드서핑 인생(人生)” 이야기를 하기로 한다.

윈드서핑의 역사는 불과 30여 년에 불과하지만
초창기에 참으로 위대한 “윈드서핑 선수” 두 분이 탄생을 하여 이 선수들 덕분에 짧은 기간에 ‘윈드서핑’은 전 세계에 전파 되고 또 발전 할 수가 있었다.
‘윈드서핑’이라는 스포츠가 세상에 처음으로 나온 이후에 그것이 세계 각국에 전파되었든 그 속도가 워낙 빨라 세상에 나온지 10년도 안되어 ‘올림픽경기’의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어지기도 하였다.  다른 ‘스포츠’ 경기종목에서는 보기 드문 현상이란다.
네시(Robby Naish)와 던커백( Dunkerbeck) 두 선수다.

‘네시(Naish) 선수’ 이야기부터 해보자.
윈드서핑은 최초에 미국의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발명되어졌고 그기서 시작되었다.. Naish도 그곳 윈드서핑의 탄생지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윈드서핑을 잘 타서 “윈드서핑 신동(神童)” 로 알려졌다.
윈드서핑의 재능을 확인한 그의 아버지는 Naish가 11살이 되었을 때 세계 정상급 수준의 경기가 자주 열리고 있는 ‘하와이’해변으로 이사를 한다. 이사를 하자마자 Naish를 각종 윈드서핑경기에 출전을 시켜 보았다. 해볼만 했다.

1976년에 그곳 하와이 해변에서
윈드서핑 역사상 첫 ‘전세계 통합쳄피언 결정전’ 경기가 열리게 되었다. 이때 유럽대륙에서 건너온 강력한 우승예상 후보 선수들을 물리치고 Naish가 1위로 우승을 한다. 그때 나이가 13살에 불과 했다.
전세계가 놀랐다, 이것은 엄청난 충격적인 대 사건이 일어난 것이었다. 하와이에서 ‘윈드서핑 신동’으로 알려진 Naish가 이제는 “전세계 윈드서핑 신동”이 된 것이다. 그 후 Nasish는  체격이 커지면서 경기때마다 안정적으로 1위로 우승을 계속 차지하자 윈드서핑 ‘신동’에서 이제는 전세계 천하무적 ‘윈드서핑 챔피언’이 되어져 갔다.

Naish의 명성은 가히 폭발적적으로 올라간다.
그것은 당시의 “비디오 테이프” 덕분이기도 하다. 60-70년대엔 PC 컴퓨터가 없었으므로 동영상은 비디오 테이프로 보는 게 유일했다. 새로 발명되어 나왔다는 ‘윈드서핑’이라는 스포츠는 ‘쓰릴’이 넘치고 역동적이라는 소문이 나 ‘윈드서핑 비디오’는 인기가 좋아 많이 팔렸다.. 이 비디오에 나오는 주인공이 그의 대부분 Naish 였다.  하와이 해변의 환상적인 이 윈드서핑 비디오는 전세계적으로  많이 팔려나가 이는 전세계에 윈드서핑의 보급 확산에 큰 역할을 하였다.

Naish가 윈드서핑의 우상화 되어지면서
당시 Naish라는 단어는 “윈드서핑 챔피언”의 대명사가 되어졌다. Naish라는 이름만 붙이면 무엇이든지 인기가 좋아졌다. 세계 곳곳에서 윈드서핑 관련 상점은 이제 "Naish"라는 이름으로 ‘점포명칭’을 바꾸어 갔다. Naish라 이름의 “윈드서핑 잡지” 책까지 나왔다.
이에 Naish는 직접 ‘윈드서핑제조회사’를 하나 만들어 “ Naish 브랜드”의 윈드서핑 제품들을 세상에 내 놓았다. 윈드서핑 보드는 물론 세일 슈트등 윈드서핑 관련 제품을 다 만들었다.  요즘도 윈드서핑 잡지에 “Naish상표” 광고가 종종 나오고 있다. 서울 한강 뚝섬지역에서도 Naish 세일이 간혹 뜨는 것을 볼 수도 있다

지난 2005년에는 Naish 선수의
세계 최초통합챔피언전 ‘우승30주년기념행사’를 하기도 하였다. 상품세일 위주의 행사였든 모양이다. 요즘 잡지에는 벌써 2015년에 40주년기념행사가 어쩌니 하는 기사도 보인다. 이번에는 “윈드서핑 박물관" 구경 이니 무슨 “윈드서핑 여행”이니 하는 것 같다. 미국 어디에 “윈드서핑 박물관”같은 것이 있는 모양이다. 아마도 윈드서핑을 발명한 슈바이처 박사와 짐 드레이크가 세계 최초로 만든 3.75m짜리 투박한 윈드서핑 보드라든가 Naish가 처음 탔든 윈드서핑등이 있는 것 같다. 이런 윈드서핑 박물관을 구경하면서 아마도 옛 “Naish의 향수”를 자극해보려는 그런 기념행사 인듯 하다.


세상엔 영원한 챔피언은 없는가 보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Naish의 전성기가 지나가고 서서히 힘이 빠져가면서 불굴의 1위 자리가 흔들리기 시작하니까 이제 세계 각처에서 Naish에 대적할 ‘라이벌’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 중에서도 국적 불명의 ‘던커백 (Björn Dunkerbeck)’ 이라는 선수가 Naish을 꺾을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그 성장세로 보아 Naish를 이기는 것은 시간문제라 했다.

드디어 Naish가 꺾기는 운명의 날이 온다.
1987년에 미국 “샌프란시스코경기”에서 ‘던커백’ 선수는 Naish를 꺾는다. 천하무적 Naish가 던커백에게 무너진 것이다. 이때 Naish가 무너지면서 내뱉은 말이 웃긴다. “쓰발. 그 친구가 기어코 나를 잡는군. ("fuck. he did it")” 라고 공개적으로 내뱉었다. 이 내뱉은 말이 전파를 타고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Naish가 무너졌다는 소식에 안타까워 하면서도
무너지면서 한 이 말이 욕(慾)을 하는 모습으로 비쳐져 누리꾼들이 물고 늘어지면서 야단들 이었다. 그가 한 말 중에서 이 ‘fuck’라는 영어단어가 큰 문제가 되었다.
이 ‘fuck’라는 단어는 우리나라 말로도 “쓰발”에 해당되어 별로 좋지 않은 단어인데 서양 사람들에게는 이 ‘fuck"라는 영어단어는 함부로 쓰면 안 되는 상당히 고약한 단어인 모양이다. 거리에서 막장 가는 그런 하급 인간들이나 쓰는 그런 단어이지 어찌 “신사”의 상징이라고 자부하며 요트를 탄다는 사람이 이런 단어를 쓸 수가 있느냐는 거였다.

그 후 Naish시대는 가고 이제 ‘던커백의 시대’가 온다.
던커백은 윈드서핑을 참으로 스마트하게 잘 탔다. 10여 년간 세계 정상의 ‘챔피언벨트’를 다른 선수에게 양보하지 아니한다.  던커백이 PWA 챔피언전에서 우승을 계속하니까 이 상금도 만만치 않게 되었다. 울산대희에서 본봐와 같이 PWA 상금은 ‘승자 독식 위주다’. 1등이 전체 상금의 반이나 적어도 40% 정도는 가져가기 마련이다. 던커백이 챔피언을 한번이 아니고 계속하니까 타는 상금은 상당히 큰 돈이 됀다. 그런데 이런 슈퍼스타로서 챔피언쯤 되면 경기대희에서 받는 상금도 상당하지만은 이에 비례하여 스폰서도 많이 붙게 되어 그 혜택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기다 던커백은 특히 스폰이 많은 걸로 유명하다
그가 쓴 모자나 슈트를 보면은 ‘로고’가 여기 저기 많이 붙어 있다. 광고규정이 정한 범위 내라고는 하지만 로고가 조잡하다 할 정도로 더덕더덕 많이 붙어있다. 상당히 유명선수라 할지라도 스폰서는 후원해주는 정도겠지만 슈퍼스타로서 챔피언 정도라면 이런 ‘로고’ 하나하나는 사실상 돈 덩어리라 불수도 있을 것이다. 그 ‘로고’의 크기가 클수록 그리고 그 위치가 중앙에 있을수록 돈을 더 많이 받을 것이다. 이 ‘로고’ 크기와 위치는 세월이 흘러 가면서 바꿔지기 마련이다.

간혹 부질없이 이 ‘로고’만 처다 보고 있는 누리꾼들이
로고가 조금만 어떻게 바뀌게 되면 무엇이 어떻다느니 하는 “까싶기사”가 간혹 나오지만 이런 까싶기사는 대게 ‘흥미위주’로 쓴 추측기사들이 많고 그래서 대부분 엉터리들 이다.
스폰서계약은 천태만상으로 그렇게 흥미있는 화제꺼리가 될 만큼 서로 사랑에 빠졌다가 또 금방 원수가 되었다가 하는 식으로 그리 큰 변동성이 있는게 아니다. 스폰서와의 관계는 대부분 은근하다. 다만 슈퍼스타쯤 돼면은 선수와 스폰서간에는 서로가 다 욕구수준이 높아 그 관계는 엄밀한 것이기 때문에 마치 남녀 간의 관계처럼 누구도 알수가 없는 그런 무엇이 있을지는 모른다.


윈드서핑을 타고 시속 최고 몇 Km까지 빨리 달릴 수 있을까 ?
던커백은 2006년 당시에 시속 76.19km 라는 속도를 내어 인정을 받았는데 이는 당시 윈드서핑의 최고 시속으로서 당시의 최고 신기록을 경신한 것이다.
시속최고기록은 측정하는 방법에 따라 그 종류도 다양하다. 요즘은 인공위성 GPS시스템이 발달되어 과학적으로 정확한 속도 측정이 가능하다. 요트경기분야에 많은 지원을 하는 ROLEX시계회사에서 개발한 요트경기의 속도측정 시스템은 과학적인 권위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정확하고 권위가 있는 속도측정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기록은 ‘공인’이 안 된다. 비공인이다

공인기록은 신기록경신행사를 실시하여
그때 자격 있는 공인계측관이 현장에 참석하여 직접 속도를 측정하여 인증서에 서명한 속도만이 공인기록이 된다.  윈드서핑은 영국 런던에 있는 WSSRC라는 한군데서만 이 공인 신기록갱신 행사를 실시해 준다. 이는 ISAF의 전신인 IYRU에서 1972년에 공인 기관으로 인증을 하였는데 아직도 그기에서만 계속하여 공인기록을 측정 하고 있다.
윈드서핑은 현재 비공인기록으로는 100Km를 넘었지만은 공인기록은 4년전 2008년에 Albeau가 수립한 시속 90.91.Km가 현재까지의 윈드서핑의 최고 빠른 신기록이다

그런데 ‘카이트(kite)’는 지난해에 마의 100km를 넘겼다.
카이트는 지난 2010년 한해에 신기록경신 행사를 무려 세 번씩이나 실시하여 공인기록을 마의 100km의 벽을 넘긴것이다. 이 신기록갱신행사를 하기 위해서는 개최비용이 들기 때문에 우선 ‘행사스폰서’가 있어야 하고 또 신기록을 갱신하려는 도전가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한번 개최 한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 윈드서핑으로서는 이 기록갱신 행사를 매년 한해 한번 하기도 힘든 상항이다. 그런데 이 카이트가 한해 무려 세 번식이나 신기록갱신 행사를 하여 기어코 100km를 넘겼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다.


무적의 던커백도 세월이 흘러 점점 늙어져 가면서
이젠 던커백 이후에 그 다음 챔피언이 누가 되겠는냐에 관심이 많아져 갔다. 프랑스인 ‘안톤 알뷰(Antoine Albeau)’가 가장 유망한 ‘참피언 상속자’로 꼽았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Albeau가 제일 선두로 치고 나왔다. Albeau가 몇 년 동안을 연속적으로 1위 우승을 계속하자 누리꾼들은 이제 Naish와 던커백 이후의 챔피언 상속자로서 Albeau가 나타났다고들 했다.

그런데 Albeau는 1등은 계속하지만 뭔가 “카리스마”가 없다
현재 세계 1위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Albeau가 1위라면 누구도 부인을 못할 것이다. 그는 엄청 빠르다. 윈드서핑이 가진 현재까지의 최고시속기록 90.91km도 그가 세운 기록이다.
하지만 Albeau는 뭔가 산뜻한 독불장군의 ‘챔피언’ 맛이 없다. 물론 이제는 시대가 바뀌어서 옛날과 같은 독불장군 챔피언 시대는 지났다고 하지만은 그래도 챔피언으로서 영 히마리가 없다. 우선 그는 경기에서 자꾸 진다. 그래서 ‘스타일’이 꾸궈지고 또 ‘김’이 센다. 올해 5월 울산대희에서도 7일 동안 내내 1위를 유지하여 우승컵을 사실상 손에 쥐었다. 그런데 마지막 날 한 경기에서 어쩌다 손에 쥔 우승컵을 그만 던커백에게 빼앗기고 말었다.

이와 같이 ‘던커백’은 1987년에 첫 우승을 한 후
25년이나 지났고 이제 나이도 50세를 바라보는 ‘늙은이’ 임에도 불구하고 올해 2011년 울산대희에서와 같이 아직까지도 이렇게 우승을 계속하고 있다. 참으로 기가 차다.
던커백은 한국에 세 번째 와서 드디어 우승까지 하였다며 너무 좋아서 미치겠다고 말했다. 한창 전성기때 그때 던커백에게 붙어진 “전설적(legend) 선수”이라는 호칭이 25년이 지난 요즘까지도 우승을 계속하고 있으니 이제는 던커백을 “살아있는 전설(living legend)”이라고도 한다.

던커백이 ‘미남형 남자’인지라 사생활 같은 건 어떤지
또 결혼은 했는지 어떤지 등이 궁금하여 울산대희 외국인을 담당하는 한문철님에게 문의해봤으나 그런 것은 잘 모른단다. 던커백이 울산에 세 번째 왔기 때문에 약간은 친해졌으므로 나는 영어가 좀 서툴지만 직접 한번 물어 보기로 했다.
참으로 요상하고 또 개인사적인 질문들이라 ‘걱정’이 많았는데 의외로 기다렸다는 듯이 기뻐하며 가족관계나 자기의 “윈드서핑 인생론”을 설명을 해주면서 잔뜩 열을 올리기 시작한다. 가족은 wife와 아들 하나 딸 하나가 현재 스위스에 살고 있으며 언젠가는 이 울산 진하 해변에 모두 와서 “가족 윈드서핑대회”를 한번 열고 싶다고 했다.


던커백은 ‘윈드서핑’만 타면 언제나 재미가 있고
자기는 마냥 신명이 난단다. 자기는 윈드서핑을 매일 타면서 자기 인생을 살아간단다. 앞으로 윈드서핑을 타지 않은 던커백은 상상을 하지도 말란다. 70살 80살 90살 100살이 되어도 자기는 탈것이란다. 100살까지 탈것이란는 이 말을 두고 ‘윈드서핑잡지’에서 한때 흥미롭게 논란이 된 적도 있다.
그가 어릴 때 싸우면서 함께 자란 나이가 한 살 어린 여동생 Britt와 요즘도 윈드서핑을 타고 싸우면서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가족윈드서핑대희”를 하면서 그 속에 자기 인생의 ‘보람’과 ‘꿈’을 느낀다고 한다. 여동생과 어머니는 자기를 능가할 정도 실제 윈드서핑을 잘 탄단다.

던커백이 울산에 왔어도 다른 선수들과는 달리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타는 것을 우리는 보아 왔다. 그는 울산대회에는 버티고 오질 아니하다가 울산대회가 점점 크게 발전하여 불참을 하니까 자기의 ‘세계랭킹’이 아래로 뚝 떨어지니까 이젠  어쩔수 없어 3년전 2009년부터 오기 시작했다. 울산에 처음 왔을 때 기자회견을 요청하였더니 자기는 “그 시간에 윈드서핑을 타야 하는데”라고 말을 하여 진하해변의 ‘겔럭시호텔’에 준비한 기자회견장에 행여 나오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울산윈드서핑협회’가 전전긍긍하며 혼 줄이 나기도 했다.

윈드서핑이라는 것을 매일 타면서
그 속에서 인생을 사는 “보람”을 느끼고 “꿈”을 찾는다는 “윈드서핑 인생론”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우리가 오늘도 타고 있는 이 ‘윈드서핑 ”이란 것이 과연 무엇인지 윈드서핑이 가지는 ‘새로운 가치’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번 유의해 볼만 하다.

윈드서핑 가족 여러분
올해도 즐거운 한가위 ‘추석절’이 되세요. (정상대 드림)








* 쥔장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11-06 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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